곤도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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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도 히로시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선수 시절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활약하며 1961년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다승왕을 차지했으나, 혹사로 인해 어깨 부상을 입어 야수 전향 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주니치 드래건스, 긴테쓰 버펄로스, 다이에 호크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등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다. 특히 1998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으로 팀을 38년 만에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9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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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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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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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사가현 도스시 |
포지션 | 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사가현립 도스고등학교 |
실업 | 브리지스톤 타이어 |
프로 | 주니치 드래건스 (1961-1968) |
주요 기록 (선수) | |
데뷔 (NPB) | 1961년 4월 9일 |
최종 출장 (NPB) | 1968년 |
통산 승패 | 82승 60패 |
평균 자책점 | 2.69 |
탈삼진 | 667 |
수상 내역 (선수) | |
일본 트리플 크라운 | 1961년 |
센트럴 리그 신인왕 | 1961년 |
NPB 승리 챔피언 | 1961년-1962년 (2회) |
센트럴 리그 평균 자책점 | 1961년 |
센트럴 리그 탈삼진왕 | 1961년 |
사와무라 에이지 상 | 1961년 |
베스트 나인 | 1961년 |
NPB 올스타 | 1961년-1963년 (3회) |
감독 및 코치 경력 | |
코치 | 주니치 드래건스 (1973-1980, 2012) 긴테쓰 버펄로스 (1988-1989)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1-1993)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7) |
감독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8-2000) |
수상 내역 (감독) | |
일본 시리즈 우승 | 1998년 |
명예의 전당 | |
헌액 유형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년도 | 2019년 |
득표율 | 76.7% (133표 중 102표) |
헌액 방법 | 경기자 표창 (전문가 부문) |
2. 선수 시절
도스 고등학교 시절 내야수였지만 투수 부족으로 투수로 전향했다. 1956년 하계 고시엔 사가현 예선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사가 상업고등학교에 패해 고시엔 대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프로 구단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브리지스톤 타이어에 테스트 합격 후 1957년 입사했다.[92] 당시 체중 62kg으로 마른 체격이라 브리지스톤을 선택, 구루메 공장 용도과에 배속되어 야구부 연습은 오후 2시부터 했다.[92]
1960년 제31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닛테쓰 광업 후타세 보강 선수로 출전, 2경기에서 호투했다.[92] 노닌 와타루가 주니치 드래건스 2군 감독으로 부임하며 곤도 영입을 추진,[95][97][98] 여러 구단 제의 중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거절하고 1961년 주니치에 입단했다.[95][99]
스기시타 시게루가 착용했던 등번호 '''20'''번을 이어받아 시범 경기에서 28.1이닝을 던져 1자책점(평균 자책점 0.31)의 성적을 남겼고, 1군 감독이었던 노닌에게서 “올해는 너를 축으로 한다”라는 명령을 받았다.[97] 프로 1년차부터 팀의 에이스로서 활약했고[100] 구원 투수도 겸했다. 그해 전체 팀 경기수 130경기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69경기에 등판하여 그중 선발 등판은 44경기였다. 35승 19패, 투구 이닝 429.1이닝, 탈삼진 310개, 평균 자책점 1.70을 기록하는 등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동시에 수상했다.[101]
잦은 등판으로 곤도를 지칭하는 ‘'''곤도, 곤도, 비, 곤도'''’(権藤、権藤、雨、権藤일본어,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매일 곤도가 던졌다)라는 유행어가 생겼다.[95][104]
2년째인 1962년에는 슬라이더를 구사해서[106] 39경기에 선발 등판한 경기를 포함하여 61경기에 등판, 30승 17패, 362.1이닝, 탈삼진 212, 평균 자책점 2.33의 성적을 남기는 등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107] 그러나 가혹한 등판과 당시의 잘못된 트레이닝 및 재활 치료 방법(투구 직후에 어깨를 따뜻하게 데웠다)으로 인해 어깨를 다쳐[106] 프로 3년차인 1963년부터는 구위가 떨어져 시즌 10승, 1964년엔 6승에 그치는 등 컨디션 난조로 부진을 겪었다.
1965년 개막을 앞두고 당시 감독인 니시자와 미치오로부터 야수 전향과 관련된 이야기를 건네 받았다.[108]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몸에 맞는 볼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61년 | 주니치 | 69 | 44 | 32 | 12 | 8 | 35 | 19 | -- | -- | .648 | 1645 | 429.1 | 321 | 20 | 70 | 8 | 3 | 310 | 3 | 1 | 97 | 81 | 1.70 | 0.91 |
1962년 | 61 | 39 | 23 | 6 | 3 | 30 | 17 | -- | -- | .638 | 1421 | 362.1 | 307 | 26 | 69 | 2 | 3 | 212 | 5 | 0 | 108 | 94 | 2.33 | 1.04 | |
1963년 | 45 | 31 | 9 | 0 | 1 | 10 | 12 | -- | -- | .455 | 922 | 220.2 | 205 | 29 | 79 | 2 | 4 | 88 | 1 | 1 | 105 | 94 | 3.83 | 1.29 | |
1964년 | 26 | 16 | 3 | 0 | 1 | 6 | 11 | -- | -- | .353 | 458 | 105.1 | 105 | 12 | 45 | 1 | 3 | 47 | 4 | 0 | 53 | 49 | 4.19 | 1.42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2. 1. 프로 입단 전
도스 고등학교 시절 내야수였지만 투수 부족으로 투수로 전향했다. 1956년 하계 고시엔 사가현 예선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사가 상업고등학교에 패해 고시엔 대회 진출에 실패했다. 프로 구단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브리지스톤 타이어에 테스트 합격 후 1957년 입사했다. 니시테쓰 입단 테스트에서 미하라 오사무 감독과 가와사키 도쿠지 앞에서 던진 경험이 자신감을 주었고, 브리지스톤 테스트에서는 아무도 방망이에 공을 맞히지 못했다.[92] 당시 체중 62kg으로 마른 체격이라 브리지스톤을 선택,[92] 구루메 공장 용도과에 배속되어 야구부 연습은 오후 2시부터 했다.[92]당시 후쿠오카는 사회인 야구가 활발했고 닛테쓰 광업 후타세, 도요 고압 오무타, 기타큐슈 지역 야하타 제철, 모지 철도국 등 강팀들이 있었지만, 브리지스톤은 동호회 성격이었다.[92] 곤도는 체력 훈련에 힘썼고, 복근, 배근 운동, 달리기, 지쿠고강변 달리기를 매일 했다.[92] 오다 미키오는 곤도를 도쿄 올림픽 육상 400m 허들 선수로 전향시키려 했다.[94][95] 1959년 브리지스톤 구장에서 닛폰 석유, 닛폰 통운, 릿쿄 대학과 경기했지만 거의 안타를 허용하지 않았다.[92] 호리모토 리쓰오를 본 곤도 동료 쓰쓰미다 다다오는 '곤도 공이 더 대단하다'고 말했다.[92]
1960년 제31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닛테쓰 광업 후타세 보강 선수로 출전, 2경기에서 호투했다.[92] 노닌 와타루가 주니치 드래건스 2군 감독으로 부임하며 곤도 영입을 추진,[95][97][98] 여러 구단 제의 중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거절하고 1961년 주니치에 입단했다.[95][99]
2. 2.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61~1968)
스기시타 시게루가 착용했던 등번호 '''20'''번을 이어받아 같은 해 시범 경기에서 28.1이닝을 던져 1자책점(평균 자책점 0.31)의 성적을 남겼고, 1군 감독이었던 노닌에게서 “올해는 너를 축으로 한다”라는 명령을 받았다.[97] 프로 1년차부터 팀의 에이스로서 활약했고[100] 구원도 해냈다. 그해 전체 팀 경기수 130경기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69경기에 등판하여 그중 선발 등판은 44경기였다. 35승 19패, 투구 이닝 429.1이닝, 탈삼진 310개, 평균 자책점 1.70을 기록하는 등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동시에 수상했다.[101] 반면 나가시마 시게오와는 상대하기가 껄끄러울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탈삼진 없이 타율 0.448로 부진했다.[102] 또한 '''429와 1/3 투구 이닝'''은 1950년 양대 리그제 시행 이후 종전 최고 기록이었던 1957년 아키야마 노보루(다이요)의 406이닝을 23과 1/3이닝을 넘는 일본 프로 야구 단일 시즌 역대 최고 기록이며 2020년 시즌 종료 시점에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단일 리그제 시대를 포함한 역대 13위).[103]연투에 연투를 거듭하면서 곤도를 지칭하는 ‘'''곤도, 곤도, 비, 곤도'''’(権藤、権藤、雨、権藤일본어,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매일 곤도가 던졌다)라는 유행어도 생겼다.[95][104] 이 말이 생겨난 계기는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인 호리모토 리쓰오가 “주니치의 투수는 곤도밖에 없는 건가. 이러다간 망가지겠다. ‘곤도, 비, 여행(이동일), 곤도, 비, 곤도’잖아”라고 기자에게 말했던 것이라고 한다.[97] 1961년 7월 4일부터는 ‘비·완봉·비·이동일·완투·비·이동일·선발(5이닝 동안 던짐)·비·비·이동일·선발(5이닝 동안 던짐)’로, 이 유행어에 근접한 12일간을 소화했던 적도 있다.[105]
2년째인 1962년에는 슬라이더를 구사해서[106] 39경기에 선발 등판한 경기를 포함하여 61경기에 등판, 30승 17패, 362.1이닝, 탈삼진 212, 평균 자책점 2.33의 성적을 남기는 등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107] 가혹한 등판에 더해 당시의 잘못된 트레이닝과 재활 치료 방법(투구 직후에 어깨를 따뜻하게 데웠다)으로 인해 어깨를 다쳐서[106] 프로 3년차인 1963년부터는 구위가 떨어질 정도의 투구로 시즌 10승 밖에 올리지 못했고 1964년엔 6승에 그치는 등 컨디션 난조로 부진을 겪었다.
1965년 개막을 앞두고 당시 감독인 니시자와 미치오로부터 야수 전향과 관련된 이야기를 건네 받았다.[108]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몸에 맞는 볼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61년 | 주니치 | 69 | 44 | 32 | 12 | 8 | 35 | 19 | -- | -- | .648 | 1645 | 429.1 | 321 | 20 | 70 | 8 | 3 | 310 | 3 | 1 | 97 | 81 | 1.70 | 0.91 |
1962년 | 61 | 39 | 23 | 6 | 3 | 30 | 17 | -- | -- | .638 | 1421 | 362.1 | 307 | 26 | 69 | 2 | 3 | 212 | 5 | 0 | 108 | 94 | 2.33 | 1.04 | |
1963년 | 45 | 31 | 9 | 0 | 1 | 10 | 12 | -- | -- | .455 | 922 | 220.2 | 205 | 29 | 79 | 2 | 4 | 88 | 1 | 1 | 105 | 94 | 3.83 | 1.29 | |
1964년 | 26 | 16 | 3 | 0 | 1 | 6 | 11 | -- | -- | .353 | 458 | 105.1 | 105 | 12 | 45 | 1 | 3 | 47 | 4 | 0 | 53 | 49 | 4.19 | 1.42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3. 지도자 시절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을 맡아, 취임 첫 해인 1998년 팀을 38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3년 동안 팀을 A클래스(1~3위)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요코하마 감독 시절 곤도는 'Don't over teach'(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기)라는 지도 철학을 바탕으로, 선수들의 감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분방주의(奔放主義)"[42]를 추구했다. 이는 당시 언론과 야구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43]
다카기 모리미치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 복귀 후인 2012년, 73세로 12년 만에 현장에 복귀하여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125][126][127] 야마이 다이스케를 구원 투수로 전환시키는 등 팀의 센트럴 리그 2위와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으나, 시즌 후 퇴단했다.[128][129]
2016년 '사무라이 재팬 평가전'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130] 2017년 제4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았다.
"지금 야구는 마무리 투수로 8할이 결정된다"는 지론을 가졌으며, 현장 복귀의 길을 열어준 아이바 사장과 요나미네 가나메를 은인으로 꼽는다.
3. 1. 코치 경력
은퇴 후 곤도는 구단으로부터 1군 매니저 제의를 받았으나, 선수 코치를 하게 되면 현직 코치의 월권 행위가 될 것을 우려하여 고사했다. 이후 도카이 라디오에서 야구 해설가(1969년~1972년)로 활동했는데, 보수는 경기당 성과별 지급 방식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111] 이 시기 곤도는 지인들과 골프를 자주 쳤는데, 이를 본 던롭 스포츠 경영자 아이바 요시로가 "야구 해설 일을 하면서 우리 회사에서 일해달라"고 제안하여 두 번째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111] 곤도는 아이바 사장을 자신을 제자리로 이끌어 준 은인이라고 말했다.[111]이후 요나미네 가나메 감독의 초빙으로 주니치 드래건스에 복귀, 2군 투수 코치(1973년~1980년)와 1군 투수 코치(1981년~1983년)를 역임하며 1974년과 1982년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가쿠 겐지, 미야코 유지로 등을 지도[112]했고, 1982년에는 우시지마 가즈히코를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했다.[113]
주니치 퇴단 후 후지 TV·도카이 TV·도카이 라디오 야구 해설자, 주니치 스포츠 야구 평론가(1984년~1987년)를 거쳐 1988년 오기 아키라 감독의 주선으로[114] 긴테쓰 버펄로스 1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야마사키 신타로를 선발 로테이션에 투입, 가토 데쓰로를 부활시키고, 요시이 마사토를 마무리 투수로 발탁했다.[115] 리처드 데이비스의 대마초 불법 소지 사건 이후에는 랄프 브라이언트 영입에 관여하기도 했다.[116] 긴테쓰 코치 시절 팀 평균 자책점을 리그 2위로 끌어올리는 등 성과를 냈으나, 오기 감독과의 갈등으로 1989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99][117]
1990년 도카이 TV 야구 해설자,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를 거쳐 1991년부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투수 코치(1991년~1993년)를 맡았다. 팀 평균 자책점을 개선[119][120][121]하고 무라타 가쓰요시, 모토하라 마사하루를 지도했으며, 이케다 지카후사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122]했다. 네모토 리쿠오 감독 부임 후에는 시모야나기 쓰요시 기용을 제안하여 그의 기초를 만들었다.[123]
다이에 퇴단 후 다시 해설자 및 평론가(1994년~1996년)로 활동하다 1997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배터리 코치 겸 수석 코치를 맡아 투수진을 정비, 팀을 2위로 이끌었다. 1998년 요코하마 감독으로 승격, 팀을 38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0년까지 감독을 맡아 3년 연속 팀을 A클래스에 진입시켰다.
요코하마 감독 퇴임 후에는 해설자 및 평론가로 활동(2001년~2011년)했다. 2002년 요미우리 1군 투수 코치로 내정되기도 했으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퇴임으로 무산됐다.[124]
2012년 다카기 모리미치 감독의 주니치에 1군 투수 코치로 복귀,[125][126][127] 수석 코치격으로 활동하며 팀의 센트럴 리그 2위와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그러나 시즌 후 퇴단했다.[128][129]
2013년부터 다시 해설자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 2016년 ‘사무라이 재팬 평가전’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130] 2017년 제4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았다.
곤도는 선수를 어른으로 취급하는 ‘Don't over teach’(너무 가르치지 않는다)를 지도 지침으로 삼았다.[131] 선수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분방주의’ 스타일은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132] 야구계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 야구는 마무리에서 8할이 정해진다"는 지론을 펼쳤다.
곤도는 코치로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감독과의 대립도 있었다. 긴테쓰 시절 오기 아키라, 다이에 시절 다부치 고이치,[51][52][53] 주니치 시절 다카기 모리미치와의 불화설이 있었으며, 특히 다카기 감독과의 대립은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 역임한 코치/감독:
팀 | 직책 | 기간 |
---|---|---|
주니치 드래건스 | 2군 투수 코치 | 1973년 ~ 1980년 |
주니치 드래건스 | 1군 투수 코치 | 1981년 ~ 1983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 1군 투수 코치 | 1988년 ~ 1989년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1군 투수 코치 | 1991년 ~ 1993년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1군 배터리 코치 겸 수석 코치 | 1997년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감독 | 1998년 ~ 2000년 |
주니치 드래건스 | 1군 투수 코치 | 2012년 |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 투수 코치 | 2016년, 2017년 |
3. 2. 감독 경력: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8~2000)
権藤、権藤、雨、権藤일본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유명했던 곤도 히로시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감독을 맡았다. 취임 첫 해인 1998년, 팀을 38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곤도 감독은 3년 동안 팀을 모두 A클래스(1위~3위)에 올려놓는 성과를 거두었다.감독으로서 곤도는 선수들을 어른으로 대우하며 'Don't over teach'(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기)라는 원칙을 지켰다. 그는 이 스타일을 "분방주의(奔放主義)"라고 불렀다.[42] 선수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곤도의 방식은 당시 언론과 야구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43]
요코하마 감독 시절, 곤도는 스스로를 "곤도 씨"라고 부르게 하고, 이를 어기면 벌금을 부과하는 독특한 방침을 세웠다.[65] 또한 선수들에게 야간 연습을 강요하지 않고 자율에 맡겼으며,[66] 회의도 최소화하고 선수들과 개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했다.
곤도 감독은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지론을 바탕으로, 마무리 투수 사사키 가즈히로를 중심으로 '중간 계투 로테이션'을 확립하여 투수진의 혹사를 막았다.[73] 반면, 희생 번트는 최소화하는 등 머니볼 이론과 유사한 전략을 펼쳤다.[76]
곤도 히로시의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 시절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98년 | 요코하마 | 1위 | 136 | 79 | 56 | 1 | .585 | - | 100 | .277 | 3.49 | 60세 |
1999년 | 3위 | 135 | 71 | 64 | 0 | .526 | 10.0 | 140 | .294 | 4.44 | 61세 | |
2000년 | 3위 | 136 | 69 | 66 | 1 | .511 | 9.0 | 103 | .277 | 3.92 | 62세 | |
통산: 3년 | 407 | 219 | 186 | 2 | .541 | A클래스 3회 |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135경기제.
3. 3.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복귀 (2012)
다카기 모리미치가 주니치 드래건스의 감독으로 복귀한 2012년, 1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125][126][127] 일본 프로 야구 구단의 현역 감독과 코치로서 최고령인 73세에 12년 만에 현장에 복귀하여 수석 코치격으로서 다카기 감독을 지원했다. 복귀 후에는 신인과 젊은 투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그때까지 선발 요원이었던 야마이 다이스케를 구원(셋업맨→마무리)으로 전향시키는 등 팀의 센트럴 리그 2위와 6년 연속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시즌 종반에 에이스였던 요시미 가즈키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하게 됐고 나카타 겐이치, 엔옐버트 소토도 등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남은 선발 투수는 시즌 10승을 기록했던 야마우치 소마를 제외하면 4승의 오노 유다이, 3승의 가와카미 겐신, 야마모토 마사, 1승의 이토 준키뿐이어서 요미우리에게 3연승을 기록하며 추월했다. 그러나 구단 측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상대인 요미우리에게 패한 직후(2012년 10월 24일)에 곤도의 퇴단을 공식 발표하면서 1년 만에 코치직에서 물러났다.[128][129]
주니치 코치 시절(2012년)에는 다카기 감독(당시)과 투수 기용 등에서 의견이 서로 대립했고, 당시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나 팀 내부에서 자기 팀 선수를 지목해서 혹독하게 비판하거나 질타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에 대해 곤도는 “감싸줘야 할 자기 팀에게 화를 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몇 십 년이나 코치를 해도 화를 내서 선수가 좋아진 적은 없다”, “언론 앞에서 선수의 욕을 하지 마라”[143], “맞고 안 맞는 것은 코치의 책임이며 이기고 진 것은 감독의 책임”이라고 비판했다.[144] 곤도는 자신의 저서에서 “프로 야구계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나는 코치 시절에 최악의 화내는 방법을 알았다. 남들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최악의 방식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혼나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인에게 있어서는 남들 앞에서 혼나는 건 부끄러운 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 일로 인하여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라고 기술했다.[145] 한편으로 2012년 시즌 종료 후 퇴단을 앞두고 “다카기 감독에 대한 응어리는 없다”라고 말했다.[146]
3. 4. 국가대표팀 코치 (2016~2017)
2016년 ‘사무라이 재팬 평가전 - 일본 vs 중화 타이베이’의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았다.[130] 2017년에는 제4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았다.4. 논란과 갈등
곤도는 현역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요코하마 감독 시절에는 마무리 투수 사사키 가즈히로를 중심으로 구원 투수진에 '중간 계투 로테이션'을 확립하여 연투로 인한 혹사를 피하게 했다.[159] 다니시게 모토노부는 "기본적으로 3연투는 시키지 않았다. 팀을 '블랙 기업'으로 만들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160]
곤도는 '보내기 번트는 적에게 아웃을 헌납하는 어리석은 작전'이라고 비판하며, 제한적인 경우에만 보내기 번트를 사용했다.[162] 이는 '머니볼 이론'과 유사하며, 메이저 리그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었다.[162] 다만 경기 종반 1점을 다투는 상황에서는 보내기 번트를 부정하지 않았고,[163] 팀이 우승 경쟁을 할 때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곤도는 '심판은 절대적'이라는 원칙을 준수하여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카다 이사오에 의하면, 한 경기에서 스트라이크·볼 판정으로 옥신각신하다가 선수에게 떠밀려 항의하러 갔지만 심판에게 사적인 얘기를 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164] 1998년 8월 7일 히로시마전에서 스즈키 다카노리의 홈런성 타구가 2루타로 판정되자 심판에게 한마디 확인하고 덕아웃으로 내려갔는데, 선수들의 불신감을 사자 다음날 선수들에게 사과하고, 하루 도시오가 수비 방해를 당했을 때 심판에게 언성을 높이며 항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곤도의 방침은 취임 2년째부터 팀 내 알력을 낳기 시작했고, 야수진과는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165] 2000년에는 팀 성적 부진을 계기로 내분이 표면화되었는데, 6월 18일 히로시마전에서 곤도가 좌타자 고마다 노리히로 대신 우타자 나카네 히토시를 대타로 내보낸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에 격분한 고마다는 경기 도중 집으로 돌아갔다.[165] 고마다는 곤도의 지휘 방침에 불만을 느껴왔으며,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곤도 역시 구단 프런트 및 이시이 다쿠로 등 일부 주력 선수들과 갈등을 겪으며 계약 만료로 퇴임하게 되었다.
곤도는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생각이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뿐'이라는 철학을 관철했다.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도 '주역은 선수'라며 출연을 고사하는 등 선수들보다 눈에 띄는 언동을 삼갔다.
4. 1. 감독과의 대립
코치로서는 직언을 잘해서 상사(감독)라고 해도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언동에는 철저히 반론을 제기하는 스타일이었다. 훗날 “‘감독 따위에게 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일하고 있었다. 감독에게 얕보이는 듯한 코치라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자신을 내보낸다”라고 밝혔다.[139] 긴테쓰 코치 시절에는 오기 아키라와, 다이에 코치 시절에는 다부치 고이치와 대립했다.[51][52][53] 주니치 코치 시절에는 다카기 모리미치와의 불화설도 나돌았는데, 특히 다카기 감독과의 대립은 언론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다.긴테쓰 코치 시절, 곤도는 투수의 육성, 심리적인 컨디션 측면에서 전략으로서 중간 계투 등을 빈번하게 기용한 오기의 투수 기용에 이의를 제기했다.[141] 한편 오기는 자신의 저서에서 코치는 감독이 아니고 투수의 이익 대표도 아니라는 점에서 곤도의 자세를 “코치라는 직분, 위치를 분별하지 못했었다”라고 비판했다.[142]
주니치 코치 시절(2012년)에는 다카기 감독(당시)과 투수 기용 등에서 의견이 서로 대립된 적도 있었다. 또한 당시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나 팀 내부에서 자기 팀 선수를 지목해서 혹독하게 비판하거나 질타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에 대해 “언론 앞에서 선수의 욕을 하지 마라”[143], “맞고 안 맞는 것은 코치의 책임이며 이기고 진 것은 감독의 책임”이라고 비유한 적도 있었다.[144] 자신의 저서에서 “프로 야구계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나는 코치 시절에 최악의 화내는 방법을 알았다. 남들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최악의 화내는 방식이다"라고 기술했다.[145] 한편으로 2012년 시즌 종료 후 퇴단을 앞두고 “다카기 감독에 대한 응어리는 없다”라고 말했다.[146]
에나쓰 유타카는 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했다.
또한 에나쓰는 2012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계투책을 높게 칭찬하면서 곤도가 주니치를 퇴단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148] 도요다 야스미쓰도 역시 곤도와 다카기의 대립을 “서로의 직무를 다하려 한 마음에서 비롯된 싸움이었다"라고 평가하면서 곤도의 퇴단을 안타까워했다.[149] 주니치에서 퇴단한 것을 1989년에 긴테쓰 퇴단 당시와 겹쳐서 보는 견해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2012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1989년 일본 시리즈에서 모두 투수 기용을 둘러싼 감독과의 대립이 퇴단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여지고 있다.[150][151]
4. 2. 노무라 가쓰야와의 대립
곤도 히로시는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이며,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생각과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뿐"이라는 철학을 가진 감독이었다.[65] 이러한 철학은 "야구는 감독의 작전 여하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라는 지론을 가진 노무라 가쓰야와 대립하게 만들었다. 노무라는 곤도의 작전 스타일과 머신건 타선을 "멋대로인 버릇없는 야구"라고 비판하며, 곤도와 요코하마 선수들의 인격까지 공공연하게 비판했다.[65]1998년, 요코하마가 리그 우승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야쿠르트와의 4연전을 치렀다. 곤도는 선수들에게 "ID 야구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고 격려하며 투지를 불태웠지만, 노무라는 "1년차 감독에게 쉽게 우승을 시킬 수는 없다"라며 가와사키 겐지로, 이시이 가즈히사 등을 투입하여 3연승을 거두며 곤도의 눈앞에서 우승을 저지했다.[82]
노무라는 자서전에서 곤도를 "전형적인 투수 타입의 성격", "호쾌한 야구를 좋아했다", "술고래였다" 등으로 평가하며 "나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야구인"이라고 썼다.[83] 그러나 곤도는 노무라가 라쿠텐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라쿠텐 선수들은 야구를 너무 모른다. 노무라 씨에게 제대로 야구를 배우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고, 노무라 사망 후에는 "인재를 간파하는 안목,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아이디어맨" 등으로 칭찬하며 그의 감독 수완을 높이 평가했다.[84]
5. 평가 및 영향
미국 플로리다 교육 리그에서의 코치 수련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를 어른으로 대우하는 "'Don't over teach'(가르치지 않기,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기)"라는 주의를 코치·감독으로 일하며 관철하고 있다. 곤도 히로시 본인은 이 지도 스타일을 "분방주의(奔放主義)"라고 명명했다.[42] 선수들의 감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팀을 승리로 이끄는 수완은 당시 각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었으며,[43] 야구계 내에서도 평가가 높다.
"지금 야구는 마무리 투수로 8할이 결정된다", "마무리 투수는 타자의 4번 타자에 해당한다. 선발 3인방보다 격이 높다" 등과 같은 지론을 가지고 있다.
현장 복귀의 길을 열어준 아이바 사장과 요나미네를 은인으로 꼽고 있다.
같은 규슈 출신의 대투수 이나오 카즈히사를 존경하여, 투구 폼에서 평소 걷는 모습까지 이나오를 모방하는 등 사숙하는 모습을 보였으며[5][83], 사회인 야구 (브리지스톤 타이어) 시절에는 연습이라고 하면 그저 이나오의 투구 폼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크게 휘둘러 축발인 오른발이 발끝으로 설 정도로 뻗어 던지는 폼은 이나오와 매우 흡사하며, 곤도는 축발의 뒤꿈치를 드는 방법만을 위해 따로 1시간을 할애하여 연습했다. 또한,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 약간 아래를 보며 걷는 모습도 잘 흉내 냈다고 한다.[85]
한편 카네다 마사이치의 NPB 400승의 가치에 대해서는, 우승을 다투는 곳에서 던지지 않았다는 점 (400승의 약 90%에 해당하는 353승을 약소 구단이었던 국철 시대에 거두었다)을 들어 부정하고 있다.[86]
후배 세대에서는 스카노 토모유키, 오타니 쇼헤이, 후지나미 신타로의 재능을 "별격"이라고 평했으며, 특히 후지나미에 대해서는 "작게 뭉쳐서는 안 된다"라는 취지로 평가하며, 제구력 난조도 용인하는 생각을 보였다. 동시에 한신 시절의 후지나미의 기용법 등 두 번 세 번 바뀐 취급에 대해 한신을 비판하며 "트레이드시키는 편이 좋지 않나요?", "저기(한신)에서는 무리겠죠"라고 한신이라는 팀이 후지나미를 육성할 그릇이 아니라고 혹평했다 (2022년 시즌 중 시점).[87]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성장했다.[88] 프로 입단 후, 월급의 절반은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냈다.[88]
럭비에 조예가 깊어, 친분이 있는 모리시게 타카시와 텔레비전에서 대담했을 때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었다.
골프가 취미이다. 현역 은퇴 후 한때 골프 관련 일을 한 적이 있다. 프로 골퍼로의 제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89] 장타자로 72세에 헤드 스피드 48m/s를 기록했다.[90]
에모토 타케노리와 시모야나기 고에 따르면, 애주가라고 한다.[91]
수상 경력 및 기타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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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 같은 규슈 출신의 간판 투수인 이나오 가즈히사를 존경했고 투구 폼에서 평상시의 걸음걸이까지 이나오를 본보기로 삼았다.[95][169] 사회인 야구팀(브리지스톤 타이어) 시절에는 연습이라고 하면 오로지 이나오의 투구 폼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크게 휘두르고, 중심발의 오른발이 발끝으로 설 정도로 뻗어 던지는 폼은 이나오와 꼭 닮았고, 곤도는 중심발의 뒤꿈치를 올리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따로 1시간에 걸쳐 연습했다. 또 약간 고개를 기울여 약간 고개를 숙이고 달리는 부분도 곧잘 따라했다고 한다.[171]
- 가네다 마사이치의 NPB 400승의 가치에 대해서는 우승을 다퉜어도 던지지 않았다(400승의 약 90%에 해당하는 353승을 약소 구단이었던 고쿠테쓰 시절에 올렸다)는 점에서 부정했다.[172]
-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스가노 도모유키, 오타니 쇼헤이, 후지나미 신타로의 재능을 ‘격이 다르다’고 평가했고, 특히 후지나미에 대해서는 ‘타협할 게 아니다’는 취지로 평가하여 거친 공도 용인할 의사를 시사했다. 동시에 한신 시절 후지나미의 기용법 등 오락가락한 취급에 대해 한신을 비판하면서 ‘트레이드로 내는 것이 좋지 않았겠느냐?’, ‘저기(한신)로는 무리잖아’라고 한신이라는 팀은 후지나미를 육성하는 팀이 아니라고 혹평했다(2022년 시즌 중 시점).[173]
-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밑에서 자랐다.[174] 프로 입단 이후 급여의 절반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냈다고 한다.[174]
- 럭비에 조예가 깊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모리 시게타카와의 텔레비전에서 대담했을 때 해박한 지식을 보였다.
- 취미가 골프인데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한때 골프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했던 적도 있었다. 프로 골퍼로부터의 권유도 있었지만 거절했다.[175] 장타에서 72세로 헤드 스피드 48m/s를 기록했다.[176]
- 미국 플로리다 교육 리그에서의 코치 수련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를 어른으로 대우하는 "'Don't over teach'(가르치지 않기,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기)"라는 주의를 코치·감독으로 일하며 관철하고 있다. 곤도 히로시(権藤博) 본인은 이 지도 스타일을 "분방주의(奔放主義)"라고 명명했다.[42] 선수들의 감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팀을 승리로 이끄는 수완은 당시 각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었으며,[43] 야구계 내에서도 평가가 높다.
- "지금 야구는 마무리 투수로 8할이 결정된다", "마무리 투수는 타자의 4번 타자에 해당한다. 선발 3인방보다 격이 높다" 등과 같은 지론을 가지고 있다.
- 현장 복귀의 길을 열어준 아이바 사장과 요나미네를 은인으로 꼽고 있다.
- 에모토 다케노리와 시모야나기 고에 따르면, 애주가라고 한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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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失敗(4)】駒田徳広、権藤監督と確執…代打出され試合中に帰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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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藤博さんは、凄い!-すーの☆ブッ飛ばしゃ~イイッショ☆ 気まぐれ飛ばし屋 ドラコンLOVEな男の毎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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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3 ノーコンピッチャーはフリーバッティングに投げろ!下柳もエモトも良くなった?アウトロー(?)の2人には共通点がいっぱい。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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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球跡巡り・第58回】「権藤、権藤、雨、権藤」 伝説の右腕を育んだ 久留米ブリヂストン球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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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藤博氏1月に野球殿堂入り 球数制限は反対、球児の気持ち最優先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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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焦土からのプレーボール 濃人渉物語(3)】勝利への執念 伝説の采配 「権藤、権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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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三振の権藤博氏が一つも奪えず 長嶋茂雄の打撃技術語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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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レジェンドたちの証言】「権藤、権藤、雨、権藤…」1日に2勝 権藤博氏 1961年10月8日、新人で35勝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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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야구 -9회 승부-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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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포수」나카오 타카요시가 본 프로 야구 입단 2 년째에 세 포수 첫 MVP 그 해의 다이요전의 대역전패가 정포수 정착의 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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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 히로시 씨 신념 부딪친 오기 감독과의 갈등/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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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한 야구론(곤도 히로시), 다카기 신임 감독과 나, 70대 콤비가 이끄는 다음 시즌의 주니치는 …
니혼케이자이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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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ドラゴンズ 公式サイト - ドラゴンズニュース ★来季のコーチングスタッフ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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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ドラゴンズ 公式サイト - ドラゴンズニュース ★高木新監督と新コーチ陣就任会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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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権藤氏、宇野氏ら新コーチ陣発表 - プロ野球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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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ドラゴンズ 公式サイト - ドラゴンズニュース ★権藤投手コーチが退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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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권등 코치 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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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칸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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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재팬 강화 시합 「일본 vs 차이니즈 타이페이」 코칭 스탭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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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지 않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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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 역대 감독의 ‘용병술과 인간의 의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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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코치는 가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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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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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받아도 거절할 수 있는 선배와 사귀는 것. 프로 야구에 관련되어 35년, 히라누마 사다하루씨의 뿌리에 대한 금언'
주고쿠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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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등박】중 4일 100구로, 투수는 20승 할 수 있다!【유유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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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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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등박】고기수도와의 비장 에피소드【유유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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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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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센이치 ‘싸움’의 방정식 - 정상을 목표로 향하는 남자의 ‘인생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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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Graphic Number’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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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野球「師弟の絆」裏物語 第3回 谷繁元信と権藤博の「一意奮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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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木監督、権藤コーチと緊急会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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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ずか1年で退団することになった 中日 権藤投手コーチを直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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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쓰 유타카의 아우트로 야구론 7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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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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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쓰 유타카의 아우트로 야구론 721회
주간 플레이보이
20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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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칼럼 체인지업
니혼케이자이 신문
201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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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悔いはない」と退団した、73歳、権藤博の“性分”。~中日でも起きた指揮官との衝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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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権藤コーチ、1年で退団の必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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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케이자이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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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野球「師弟の絆」裏物語 第3回 谷繁元信と権藤博の「一意奮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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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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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年の横浜優勝時の権藤監督が実践した「三無主義」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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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포스트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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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鉄瓦版、第251号、2018年、4月号、特集「ほめる」ってどうですか?、選手を導くために、野球評論家、山下大輔、6-1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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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督も選手も個性を 権藤氏・古田氏が対談(後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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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케이자이 신문
201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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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裏話】権藤監督がほぼピッチングコーチだった件w【遠藤一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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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原点
202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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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督も選手も個性を 権藤氏・古田氏が対談(前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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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케이자이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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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井秀喜氏を苦笑させた「横浜のマシンガン打線による12-13x大逆転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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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藤博の「奔放主義」
닛칸 겐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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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繁元信コラム 「権藤さんはチームを“ブラック企業”にさせ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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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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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にもいた「バントの嫌いな監督」 日米野球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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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藤博「セの采配は“緻密”ではなく“怯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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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 역대 감독의 ‘용병술과 인간의 의지력’
다카라지마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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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と30本 駒田徳広 職場放棄「2軍でも何でもいい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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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nichi Annex
200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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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失敗(4)】駒田徳広、権藤監督と確執…代打出され試合中に帰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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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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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くなった野村克也さんが、最後まで嫌った「8人の男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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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rt FLASH
20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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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프로 야구 뒷쪽 읽기 독본
다카라지마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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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프로 야구 최강의 에이스는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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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権藤博氏「野村さんのすごさは人材を見極める眼力」
https://www.nikkansp[...]
닛칸 스포츠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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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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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権藤博】権藤が選ぶ、歴代最強の3投手!【悠々球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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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原点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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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藤博】藤浪晋太郎の再生の仕方【悠々球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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よみがえる1958-69年のプロ野球 別冊ベースボール Part4 1961年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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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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